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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유성희 전 회장, '너그럽고 온화함으로'

고인 유성희 전 회장, '너그럽고 온화함으로'

  • 오윤수 기자 kmatimes@kma.org
  • 승인 2001.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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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사회 회장직 7년연임‥'기초수업' 탄탄
수가현실화 등 보험제도 개선에 노력

대한의사협회 제29대, 제30대 회장을 역임한 고 유성희 회장(아호·睡山)은 털털하면서도 뚝심있는 그야말로 `정의의 인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60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 동대문구에서 `정형외과 의원'을 열면서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유 전 회장은 78년 동대문구의사회장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의료계 지도자의 길로 나섰다. 의료계 기초단체라 할 수 있는 구의사회 회장직을 무려 7년이나 연임(78∼85년)하면서, 요즈음 흔히 얘기하는 `민초의사'의 고충을 이해하고, 이들이 당면한 의료현안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았다.

이처럼 의료계에 대한 `기초수업'을 탄탄히 받은 유 전 회장은 경험과 충정을 살려 의료계 중앙무대로의 진출을 결심하게 된다. 85년 3월 서울특별시의사회 제39차 대의원총회에서 회장에 선출된 그는 중요한 의료현안 중 하나인 의료분쟁조정법 제정 추진을 비롯, 의료법 및 의료보험제도의 불합리한 부분에 대한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77년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시행하면서 의료계에 많은 핍박과 고통을 안겨준 저수가 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의료보험특별위원회'를 구성, 수가현실화·진료비 심사기구 독립 일원화·강제지정제 폐지·진료비 청구서식 간소화 등 보험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스터디에 돌입했다.

최근에도 의사에 대한 처벌 규정을 대폭 강화한 의료법 개정안을 강행하려는 정부가 의료계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고 있지만, 86년 당시 보사부가 태아성감별 행위에 대해 면허취소 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등 형평성 없는 법개정을 추진함에 따라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서울시의사회를 포함한 5개 시·도의사회에서 의료법 개정안에 대한 공청회를 열어 의료법 개악에 대한 저항력을 결집한 다음, 의협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의 긴 싸움끝에 체형조항 삭제 등 정부가 만든 체벌조항을 대폭 완화시키는 개가를 올려 의료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했다.

또한 엉터리 보험제도에 대한 회원들의 분노가 전국민의료보험 시행을 앞두고 증폭되자, 당시 유성희 서울시의사회 집행부는 63빌딩에서 결의대회를 열어 `지정서 반납' 등 대정부 투쟁의지를 고취시켰다.

이렇듯 회원 권익 보호에 앞장선 유 전 회장은 불철주야로 뛴 맹활약에 힘입어 94년 4월 의협 정기총회에서 대의원 289명 중 178표를 얻어 의료계 종주단체인 의협 제29대 회장에 오르게 됐다.

풍부한 경륜과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로 정평난 그는 의협 회장에 취임하면서 “회원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같은 각오로 출범한 유성희 의협 집행부는 94∼97년 3년간 의보수가를 네차례에 걸쳐 총 28.42%를 인상, 저수가로 인한 의료계의 갈증을 크게 해소시켰다. “잘못된 의료보험제도의 개선은 의료환경을 바르게 정착시키는 최우선 과제”라는 것이 평소 지론인 유 회장은 수가 인상 뿐 아니라, 의료발전을 저해하는 근원적인 수가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상대가치개발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집행부 최대 역점사업으로 추진했다.

저질의사 양산의 지름길인 정부의 무분별한 의대 신·증설 정책을 막기 위해 범 의료계가 참여하는 `의대교육발전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사회적 여론조성에 온 힘을 쏟아 결국 의료계의 주장을 상당부분 관철시켰다. 이밖에 매년 되풀이되는 세무대책 등 의사의 권익 보호를 위해 활발한 대정부 활동을 전개하며 역동적인 회무추진에 나섰다.

특히 이번 방북길에 운명을 달리하는 불행이 초래됐지만, 유 전 회장의 남북의학교류에 대한 집념과 노력은 오래전 부터 싹이 텄다. 그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모두가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정치색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한 뜻에서 의학교류를 추진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89년 세계핵전쟁예방의사연맹의 한국지부인 핵전쟁예방 한국의사연맹 부회장을 맡으면서 북한과의 의학교류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후 97년 6월쯤 의협의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계획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세부적인 실천방안으로 의약품 및 의료지원을 위해 민간단체와 각 보건의료단체가 의협을 중심으로 `단'을 구성해 추진하는 것이었다. 유 전 회장은 이같은 남북의료협력사업을 구상하면서, 조심스럽게 물밑 접촉을 시도해 나갔다.

이같은 노력이 밑거름이 돼 마침내 지난 7월 9일부터 17일까지 8박 9일간의 일정으로 북한 방문 일정이 성사됐는데 안타깝게도 그 결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방북도중 숨을 거두었다.

94년부터 2000년까지 2대에 걸쳐 회무를 추진하는 동안 그에게는 행운도 따랐고 많은 시련도 닥쳤다.

최대의 고통은 현 의권투쟁의 근원인 잘못된 의약분업을 정부가 강행하는데서 비롯됐다. 정부는 의약분업을 시행하기로 약사법 부칙에 근거 규정을 두었으며, 현 정부도 출범과 동시에 의약분업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면서 무리한 강행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의협 집행부는 97년 국무총리 산하기구로 운영된 `의료개혁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적극적이고 발빠른 대처로 일관했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자 당시 의개위가 제시한 `단계별 의약분업안'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시민단체를 앞세우며 엉터리 분업안을 강행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막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의약분업 시행에 앞서 99년 11월 15일 실거래가 상환제가 전격 시행되면서 의료기관의 체감 경영난이 최고조에 달하자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규탄하기 위한 의사들의 함성은 노도처럼 밀려 들었다.

`올바른 의약분업 쟁취를 위한 범 의료계 결의대회'를 준비한 당시 유성희 집행부는 동분서주하며 성공적인 대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료계 사상 초유로 3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진 규탄대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으며, 이를 계기로 현 의권투쟁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의협 집행부로 향하면서 2000년 1월 8일 임시 대의원총회를 열어 유 전 회장의 사퇴를 가결했다. 그는 회장직을 맡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많은 회원들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 새로운 투쟁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회장 사퇴 이후 몸과 마음이 조금도 편치 않았을 고인은 마지막까지 국가와 의료계를 위해 방북길에 오른 것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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